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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기린의 말

04. 넷째날


페리포트


그린게스트하우스는 작은 규모에도 공간을 잘 구획해 놓아 컴팩트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1층은 로비과 거실, 3층은 주방과 샤워실, 2층과 4층은 객실이었다. 성수기에는 숙박하는 인원 수에 비해 시설은 좀 부족하지 않을까 했지만 가고시마에 성수기가 있을까 싶다. 이번 여행의 컨셉은 '오는 사람 막지 말고 인연 한번 만들어 보자' 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숙소를 게스트하우스에 도미토리로 예약했다. 하지만 하루 머물며 잠만 자기엔 인연이란 것을 만드는 의미와 만들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을 3일째 밤에 깨달았다. 2층 침대의 외국인이 밤새 뒤척거려 덩달아 나도 뒤척이다 깼고 약기운에 욕도 했던 것 같다. 그러고 나면 조금 잠잠했다. 욕이란 것은 언어의 장벽이 없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야쿠시마행 페리티켓을 사는 일이었다. 미야노우라港으로 가는 배편은 7시부터 있었는데 야쿠시마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없었으므로 여유롭게 13시 표를 샀다. 돌아오는 배편은 10시로 예약했고 왕복 15000円을 지불했다. 13시에 출발하는 배편은 다른 항구를 거치지 않아 두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3일 내내 비행기, 철도, 버스를 하루에 너댓시간은 족히 타고 다니느라 생긴 만성 멀미에 최대한 무엇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을 단축하고 싶었다. 참고로 미리 구매할 때 주는 티켓은 일종의 예약권으로 그 티켓으로 승선할 수 없으며 20분 전에 창구로 와서 다시 좌석권으로 교환해야 한다. 덧붙여 시간을 여유롭게 잡은 이유에는 가고시마 에키벤을 사기 위함과 (전날 먹은 감기약의 효과가 미비해) 약보다 절실하게 나에겐 모닝커피의 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티켓을 사고 텐몬칸의 스타벅스로 향했다. 



애플파이


스타벅스 찾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스타벅스는 된장질의 아이콘이 되어버렸지만 늘 같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가치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특히 타지에서의 스타벅스는 내가 어느곳보다 안도할 수 있는 장소다. 역시나 이곳에서 나는 그다지 이방인 같지 않았고 사람들도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신메뉴로 나온 음료와 애플파이를 주문했다. 언제나 나의 선택은 애플파이다. 애플파이는 개인적인 추억이 깊은 음식으로 따로 글을 쓰는 것으로 하자. 텐몬칸에서의 모닝커피의 순간에는 공복의 당 섭취로 분비된 호르몬이 뇌의 정서적 안정감을 끌어올려 감기가 다 나을 것만 같았다. 책을 조금 읽고 벌써 중반에 들어선 여행과 남은 야쿠시마에서의 일정에 대해서 생각했다. 월요일 아침이라 회사에서 메신저나 메일 알람이 와서 내용을 간단히 확인하고 알람설정을 변경했다. 


애플파이


텍스트화 된 나의 일상을 보니 '내가 이런 사람의 삶을 살고 있구나', 약간 기분이 묘했다. 불과 3일이 지났을 뿐인데 비일상이 계속되고 있으니 멀게만 느껴졌다. 만약 다른 사람의 휴대폰을 주워 메모나 메일이나 메신저 등을 확인하게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나. 앗, 이 순간 또 오버랩되는 너의 이름은!! (제발) 쓰다보니 일전에 지인이 해준 얘기가 생각났다. 헤어진 연인이 지인의 컴퓨터를 사용한 후 메신저 계정을 로그아웃하지 않았고 지인은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퇴근하고 집으로 와 누구와 어떤 내용을 주고 받았는지 확인하는 것이 당시 짧은 낙이었던 것도 같다. 헤어진 연인의 심정을 알 수 있을까 했는데 점점 자기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얼마 안있어 '그짓'을 그만뒀다고 했다. 도대체 한 사람은 몇 개의 얼굴을 가질 수 있는걸까. 


가고시마추오역에는 <에키벤>과 동일한 에키벤을 팔지 않았다. 미야자키와는 사뭇 다르게 매대에는 종류도 다양하고 화려한 에키벤도 많았다. 몇 회 그랑프리! 무슨무슨 예선 출전! 등의 숫자들이 있었지만 점원에게 추천을 부탁하여 <사쿠라지마하이보시>를 샀다. 사쿠라지마의 화산재를 넣어 맛을 이끌어냈다고 했는데 글쎄 "음~ 화산재맛!" 하면서 먹지는 않았다. 다시 페리포트로 돌아가는 길에는 휴대폰이 꺼졌는데 이번 여행중 최대의 위기였다. (그만큼 여행은 무탈했다) 가고시마추오역에서 나오자마자 건널목을 잘못 건넜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방향이 아니라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왜냐면 가고시마추오역까지 걸어오면서 아직 가타카나가 익숙하지 않은 나는 간판을 계속 읽으면서 왔는데 처음 읽는 간판이 많았기 때문이다. 택시를 타도 됐지만 명색이 건축과를 나왔는데 이까짓 쯤 돌아갈 수 있다는 오기로 몇 사람에게 텐몬칸 방향을 물어 제대로 찾아왔다. 까막눈판 헨젤과 그레텔이었다.  


무우가 너무 예쁘다


살까말까 망설였던


가고시마추오역이 코앞


비로서 안도한 거리



야쿠시마


야쿠시마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미야노우라港에서 내린 시간은 세시 반정도 되었을라나 비가 문제가 아니라 바람이 엄청나게 불었다. 가고시마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잠잠했던 바다가 야쿠시마 도착하기 이십분부터 험악해진데에는 이 바람이 만든 파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숙소 후렌토(ふれんど)까지는 걸어가기 충분한 거리였는데 비도 오고 바람도 불고 아무튼 정신이 없었다. 초등학교 수업이 끝난 시간인지 꼬맹이들이 더러 있었는데 바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깔 하고 지나갔다. 이런 날씨에 반바지에 무릎 양말이라니 믿기지 않지만, 반바지 아래의 가늘고 올곧은 다리가 씩씩하다. 일본의 초등학생들은 어딜가나 안전모 같은 노란 모자에 란도셀 가방을 매던데 이쯤되면 저런 착장은 세대를 대물림하는 유년기의 상징이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저렇게 입는다면 누구라도! 귀엽지 않을 수 없을거다. 하지만 나의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보라색 골덴 쫄바지 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때의 엄마들은 다 그런걸 입혔다.      

 

바람을 마주하며 씩씩


후렌도는 미야노우라港에서 나와 계속 걷다보면 첫번째 삼거리가 나오는 곳에 있다.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이 계셨다. 할머니는 마치코상이고 숙소를 관리하시는 분이고 거실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가 바로 닷짱. 닷짱에게 얼마나 큰 깨달음을 얻게 될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닷짱은 혼자 온 내게 어디서 왔는지 내일은 어디에 갈 건지 등산화는 있는지 등을 묻고 따땃한 차랑 초콜릿을 권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닷짱과 나는 영어랑 일본어를 섞어 가면서 말을 주고 받았는데 내가 야쿠시마에 간 시기는 1월로 비수기에 해당하고 시라타니운스이쿄와 조몬스기는 그날그날의 날씨에 따라 못 가기도 한다고. 매일 아침 7시에 해주는 마을방송을 들으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마을사람들 모두 방송을 기다리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어쩐지 귀엽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시라타니 하루는 조몬스기에 갈 계획이라고 하니 조몬스기는 입구까지 가는 버스가 11월부터 2월까지는 운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뭣이! 


아씨 몸도 안좋고 어차피 나에게 꼭 트래킹을 해야한다는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혼자 산 속에서 괜찮을까 괜시리 걱정도 했던터라 일단은 오케이. 방으로 들어가 하루 펑크난 일정을 무엇으로 메꿔야 하나 고민하기로 했다. 도미토리는 3명이 묵을 수 있는 방이었고 층고가 매우 높았다. 누군가 올라가면 삐걱대는 2층 침대가 아니라 복층이라 생각 될 정도로 높아 2층 침대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크고 어두운 색의 가구 때문에 방의 분위기도 어두웠지만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덮으면 딱 좋을 어둠이었다. 일본 침구 중에 이불이 한국보다 유달리 무거운데 이게 들추기가 힘들지 그 안에 들어가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그대로 한 시간의 낮잠을 잤다.   


맥주맥주 맥주사러 가는 길


당과 잠으로 에너지가 조금 보충됐는지 일어나서 동네 구경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정말 여유롭게 산보하고 싶었는데 미칠듯한 바람은 여전했다. 마치코상이 알려준 마트로 걸음을 재촉했다. 해만 떨어졌으면 다카치호에서 맥주 원정나갔던 것과 비슷한 꼴이었다. 게다가 마치코상이 알려준 마트는 A-Coop이었다. A-Coop 만세.

짠 감자칩을 와그작 거리며 먹고 싶어서 과자랑 맥주를 몇 개 샀고 신이 나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작은 서점이 있었는데 가게 주인이 꾸벅 졸고 있었다. 망하지는 않나, 살 만한 책은 있나 했는데 생각외로 신간도 많고 아빠랑 아들 손님도 들렀다 갔다. 사고 싶은 책이 두 권있었는데 읽을 수 있다고 판단한 야쿠시마를 주제로 한 그림책을 샀다. <水の森>. 나중에 닷짱이 알려줬는데 타카다유코(高田裕子)라는 작가는 야쿠시마에서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야쿠시마로 유명하다고 했던가. 어쨌든 나를 위한 작은 기념품을 산 셈이었다. 



숙소에 돌아와보니 거실에서 닷짱과 처음보는 사람들이 자그맣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여행자니까 모든 사람들이 처음보는 사람인게 당연하지만 저렇게 친밀해 보이는 사람들은 숙박객이 아닐 것 같으니까. 그래.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닷짱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했고 다들 반겨주었다. 그 중 한 명은 나와 방을 같이 쓰는 유키라는 사람이었는데 합석을 권했지만 '예의상' 거절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곧잘, 종종, 자주 그런 권유는 거절했었고 그런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지어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런식으로 나는 몇 번의 기회를 놓쳐버린걸까 생각했다. 조금 있다가 유키상이 방으로 들어와서 9시부터 3층 주인 집의 진짜 거실에서 '드링킹 미팅'이 있으니 원한다면 가자고 했고 그러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