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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기린의 말

내가 키가 남들만치 다 자라지 못한 것에는 우유를 버린 죄 일지도 모르나, 잠을 자지 않은 탓도 있다. 오늘은 유난히 피곤하여서 세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서관에서 간단히 책을 빌리고 집으로 향했다. 도중에 사이즈 없는 옷을 찾기 위해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갔으나 역시 없었다. 키가 자라지 않은 것에 따른 불편함은 다른 사이즈들도 작다는 것에 있다. 어쨌든 실망감으로 더 피곤해진 탓인지 덜컹거리는 지하철에 정신없이 몸을 담아 집에 무사도착. 미처 해가 지지 않은 오후의 귀갓길은 너무나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 맨정신으론 해가 있는 시간에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한 달에 한 번 배가 아플 때나 설계하고 밤을 새운 다음 날이라거나 술이 가득한 엠티의 다음날이거나. 

지하 주차장을 또각또각 지나 통로로 향하는데 왠지 아빠일 것 같은 바퀴 소리가 났다. 실은 바퀴 소리라기 보단 운전의 리듬감 같은 것이다. 차가 입구의 램프를 타고 내려올 때 어디서 조금 더 속력을 낸다던가 회전의 리듬감 그리고 그 후 잠시 멈춰 빈자리를 확인하는 잠깐의 시간 등. 거기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탓에 아빠일 것 같다는 육감은 강한데 내 머리는 부정했다. 재촉해서 집에 왔는데 역시나 막바로 아빠가 들어오셨다. 츄리닝 바지만 갈아입고 상의는 외출복 차림으로 아빠를 맞이하고 피곤하여 일찍 들어왔다고 하니, 언제깨워줄까? 물으시곤 어디론가 나가시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다. 개강을 하고부터 어쩐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쌓인 잠에 대한 불만이 오늘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 내는 걸까. 

어렸을 때부터 잠에 대한 취미는 없었다. 보통 그 나이 때에 자는 낮잠을 재우기 위해 엄마는 나를 안고 잠이 들었지만 항상 낮잠을 자는 쪽은 엄마였다. 나는 엄마가 잠이 드는 10분을 조용히 말똥거리다 엄마의 숨소리가 일정해지면 살금 빠져나와 혼자 놀았다. 중 고등학교 때야 '열공'하느라 잠이 많은 얘들에 비해 잠이 없는 건 축복이었다. 그래서 잠을 조절하지 못하는 '나약한' 얘들을 나는 어느정도 정신력이 쇠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물런 그 생각이 변한 것은 아니지만, 일정량의 잠을 자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그를 보다(마치 한번에 불이 팟- 하고 나가는 것 같다. 그렇게 코피를 쏟기도 한다), 기름통의 게이지처럼 잠도 일정량 채워져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잠을 몸이란 시스템을 유지시키기 위한 뇌 위한 욕구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맨날 삼만원어치 기름을 넣고 달리다. 오늘은 가득넣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