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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기린의 말

03. 셋째날


다카치호 탈출


글머리를 다카치호 탈출이라고 적게 된 것에는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이렇게 이름 짓게 된 것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 전날은 숙소에 체크인 하고 나와 슈퍼를 찾았으나 거리의 가게들이 지나가기 무섭게 문을 닫아 20분 만에 포기하고 다시 돌아왔다. 숙소 카운터에 '가까운' 슈퍼를 물어보니 시계를 보고 7시가 지난 것을 확인한 후 A-Coop이란 마트를 알려줬다. 맥주 하나 사자고 헉헉대며 언덕을 넘어가면서 '그래, 천손강림의 마을이랬으니 신들이 내가 술을 멀리하도록 돕는 것이구나'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족히 A-Coop 규모의 3배는 되어 보이는 파칭코 업소를 봤다. 하루를 마감한 고요한 마을의 파칭코는 유독 그 기세가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가쿠라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A-coop보다 가까운 거리에 편의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요가쿠라 행렬이 지나갔다고 해도 몰랐을 정도로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셋째날 아침. 천손강림 마을의 아침을 맞이하고자 상쾌한 기분과 가벼운 몸으로 숙소를 나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천손강림이라는 단어에 무슨 기대를 했던걸까. 숙소에 우산이 비치되어 있었으나 왠지 짐이 될 것 같았고 곧 그칠거라 생각하여 짧은 고민 끝에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고민은 정말 짧은 고민이었음을 아니, 그런건 고민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후 나는 그것과 똑같이 생긴 우산을 40분 뒤 다카치호 협곡에서 사 열차에서, 페리에서 여행 내내 혹처럼 달고 다니다가 야쿠시마에 후렌도에 기증하게 된다. 어쨋든 천손강림의 마을에서의 일정은 다카치호 신사에서 다카치호 협곡으로 이어지는 올레길을 걷는 것이었다. 이번 편에서 특별히 과거시제가 거슬리는 것은 정말로 기분 탓이 아니다. 

전날 가쿠라를 보기 위해 왔던 다카치호 신사에서는 직원들이 아침 청소를 하고 있었다. 주차장도 넓직하여 관광버스도 주차할 수 있었고 자질구레하게 기념품을 살 수 있는 매대도 있는 관광객 맞이용 신사 같았으나 싫지는 않았다. 직원들은 여느 일본사람과 다름없이 상냥했고 흐린 날씨와 높은 나무 때문에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분홍색 전통의상을 입고 석정을 만드는 듯한 방법으로 빗질을 하시는 분이 인상적이었다. 다카치호 협곡으로의 올레길은 신사 뒷편으로 나 있었는데 비수기 시즌에다 비도 오고 인적이라곤 없어서 이 길이 맞는지를 심히 고민했다. 갔다가 돌아오고 조금 더 갔다가 돌아오고 갔던 길을 두 번인가 세 번은 돌아올 정도였다. 세 번째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을 보고 이 길이 맞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때까지는 그저 '올레길을 못 걸어서 아쉽다' 정도였는데 이 우회로로 인해 다카치호 협곡의 감동이 유니버셜스튜디오 쯤 되어야 했는데 송도유원지에서 그치게 된다. 그리고 그 우회로는 경사도 심하고 굴곡진 차도였기 때문에 대관령 넘어가는 도로를 생각나게 했다. 나무와 협곡 그리고 물이 어우러진 자연 속의 길을 여유롭게 걷는 것 대신 물에 젖은 아스팔트를 20분 정도 걸으니 다카치호 협곡에 도착했다. 아소산의 화산활동으로 생긴 기묘한 절벽과 완벽한 청록색에 가까운 강물은 감탄을 자아내는 경관이긴 했다. 폭포를 가까이서 보고자 협곡에서 보트를 타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나에겐 나를 위해 노를 저어줄 사람도, 누군가를 위해 내가 노를 저어야 할 대상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구경하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있었다 하더라도 보트는 타지 않았을 것이다. 돈을 주고 사는 체험은 거부감이 든다는 삐뚤어진 이유로 보트 대신 나는 우산을 하나 샀다.  


다카치호 협곡 폭포


다카치호 협곡


협곡 보트 폭포


이후 다카치호 협곡에서 올레길 우회로 안내문을 또 보게 되는데 그 순간 나는 다카치호 탈출을 결심했다. 그 두번째 안내문은 내가 다카치호에서 더이상 할게 없음을 의미하기도 했고 여기선 뭘해도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노베오카로 돌아가는 마지막 버스 시간을 알아봤던 나는 곧바로 첫차 시간을 확인했고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 첫차를 탔다. 노베오카에 도착할 때까지 버스에는 네 명의 승객이 타고 내렸다.         


다카치호 탈출 직전



미야자키 탈출


노베오카에서 바로 가고시마로 가기 아쉬워 미야자키를 둘러보기로 했다. 미야자키에 내린 이유에는 미야자키 에키벤을 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미야자키 에키벤은 만화 <에키벤>에 나온 그림과 똑같았고 그 당시에 비해 가격도 40엔 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지켜지고 있는 만큼 맛도 맛있었다. 표고버섯밥이었다. 미야자키 역 앞에는 커다란 야자수가 있는데 야자수 때문에 '어쩐지 여기는 따뜻할 것만 같아!' 라고 함부로 생각했다가 역사를 나서는 순간 바로 고쳐먹었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더 (춥고) 횡한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미야자키 신궁이 1일 버스패스로 갈 수 있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으나 내가 기다리던 버스는 오지 않았다. 유일하게 일본 여행중에 바람맞은 버스였다. 그 덕에 찬바람도 실컷 맞았다. 


생각고쳐 먹기


내가 비록 비행기를 타고 왔다지만 같은 바다를 사이에 둔 한국와 일본이 같은 기상 이변을 겪을 것이라는 생각을 왜 못했던걸까. 가고시마며 구마모토며 예상치도 못하게 추웠고 낮동안 나빠진 컨디션을 밤에 회복하는 것을 반복하여 상태가 좋아질까 하면 나빠지곤 했다. 그래서 평소같으면 미야자키 신궁도 걸어서 갔겠지만 여기서 무리했다간 야쿠시마 일정에 정말 무리가 있을 것 같아 츠타야로 피신하듯 들어가 열차 시간을 기다렸다. 일전에 오사카에서 마루젠&준쿠도에서 책의 주제 별로 분류가 상당히 세분화되어 있어 관심분야의 책을 집중해서 볼 수 있었고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내는 경험과 비슷해 머무는 시간이 즐거웠었는데, 츠타야에서는 일반적인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진열방식이었던 것 같아 별달리 인상적인 부분은 없었다. 다만, <地図趣味> 라는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감기약을 사먹고 무사히 미야자키도 탈출했다. 


가고시마에서는 페리 포트와 가까운 그린게스트하우스에서 숙박했고 야쿠시마행 페리 좌석은 여유가 있어 다음날 아침에 사기로 했다. 고속페리 티켓은 4일 전까지만 인터넷으로 예매가 가능하며 좌석의 공석 여부는 인터넷으로 확인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