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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기린의 말

01. 첫째날


기내에서


가고시마행 비행기는 오전 8시 반이었다. 일기예보에서는 그 전날부터 눈을 예보했지만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떄문인지 눈이 올 것이라는 예보를 믿지 않았기 때문인지 나는 일정에 아무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출발은 금요일이었는데 목요일엔 당연하게도 야근을 했고 퇴근후에 짐을 싸는 바람에 잠은 거의 못잤다. 한 두시간 잠깐 눈 붙였을 뿐인데 창밖이 새하얗게 되어있었고 '오옷 정말 눈이 오네' 하고선 집을 나섰다.


체크인 카운터에서는 20분 지연을 얘기해주었기 때문에 20분 정도의 여유를 더 갖고 공항을 돌아다녔다. 강설의 공항은 처음이었는데 색다른 풍경이었다. 밖은 엄청나게 춥고 위험한 곳인 반면 탑승 대기장은 평화로웠고 누군가는 들뜨고 누군가는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출발하는 게이트가 다른 게이트와 층이 달랐고 달랑 두 개의 게이트만 있는 곳이었던지라 다른 곳보다 훨씬 조용했다. 이대로 아무 문제 없이 출발하는가 싶었다.



나는 비행기에 탑승한 이후로 꼼짝없이 두 시간을 제자리에 있었다. 문제는 비행기도 제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언제였던가 한 십년전 쯤에 강설로 지하철 한 정거장 가는데 두 시간이 걸린 이후로 신기록이다. 기내 방송에서는 처음에 20분 지연을 얘기하더니 20분 뒤 또 다른 20분 지연을 얘기했다. 예정한 40분이 지났을 때는 한 시간 반 지연을 얘기해 승객들은 야유했다. 가고시마행에는 30대 혹은 40대로 보이는 3인 이상의 남성 무리가 여럿 있었는데 이윽고 이들은 맥주와 땅콩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곳 특산품이 땅콩이라 오해할 것 같았다. 뭐, 쓰고 보니 영 틀린 말은 또 아니다. 비행기 안은 어찌나 춥던지 나는 그때 기내에서 걸린 감기로 인해 이후 7일간을 바다 건너 타지에서 얼마나 많은 코를 풀어대게 될지 상상도 못했다.



가고시마 공항 → 가고시마추오 역


감기에 멀미에 네 시간만에 몸이 너덜너덜해 졌지만 어쨌든 왔다! 가고시마다! 공항은 매우 작았지만 그 와중에도 가고시마추오역에 가는 버스를 못찾아서 안내소 직원에서 물었다. 에헴 그러니까 내가 4개월을 배운 일본어를 처음으로 시전하는 대상이 카와이한 일본사람(남)이었다는 말인데 내 말을 알아들어서 그게 또 너무 신기해서 감탄하느라 답을 못들었다. 지금 장소가 공항이 아니고 내가 커다란 백팩을 들고 있지 않고 당장 타야 할 시내로 가는 버스가 어디인지를 묻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 생각을 하느라 답을 못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매뉴얼대로 친절히 약도와 함께 알려주었고 나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가고시마추오 역 → 구마모토 역


가고시마추오 역에 도착해 제일 먼저 해야하는 일은 여행박사에서 받은 종이를 JR남큐슈패스로 교환하는 일이었다. 가고시마추오 역은 용산역처럼 우측에는 쇼핑센터가 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역사로 진입하는 구조인데 역사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JR패스를 교환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오사카처럼 복잡한 곳일까봐 못찾을까봐 걱정했는데 그럴 일 절대 없다. 번호표를 뽑고 순번을 기다렸다가 손에 쥔 번호가 깜빡거리는 창구로 갔다. 아아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어를 시전하게 된 대상도 카와이한 일본사람(여) 인 것에 만세를! 게다가 엄지척 신속하고 친절하다. JR패스로 교환하고 나서 3일간의 구간을 지정석으로 다 예약하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예매해야 할 열차에 동그라미로 표시해 둔 꼬깃꼬깃한 A4용지를 보여주며 '고레' '고레' '고레' 하면서 7개 구간의 열차 예약에 성공. 깻잎머리가 잘 어울리고 입도 작고 목소리도 작은 분이었다. 목소리가 작은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잘 못알아 들었을 거니까.  


가고시마 열차 플랫폼


그리고 그 첫번째로 예약한 신칸센을 타고 구마모토로 향했다. 구마모토에서 출발하는 이사부로 열차가 아침 8시 31분에 한 대 밖에 없는데 이 열차를 타기 위해 나는 구마모토로 향하는 일정을 짜게 된 것이다. 3월 부터 11월 사이에 여행했다면 SL 히토요시를 탈 수 있었을텐데 그건 또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여행을 하면서 안되는 것은 빨리 포기하고 아쉬운 마음을 접는 것에도 차차 익숙해져 가고 있구나 생각했다.    



KⅡHOTEL 


구마모토역


구마모토 (아마도) 버스종점


숙소는 시내 중심에 있었고 구마모토 역에서 걸어서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적당히 역과 거리가 있어 동네를 돌아보기에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현실은 바람도 많이 불고 종종 비인지 모를 것도 내리고 날씨도 추웠던지라 마냥 아름답고 여유만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큐슈의 큰 도시중 하나인데 이렇게 조용해도 되나 사람이 사는걸까 라는 생각은 아주 잠시하고 그저 너무 춥다고 생각했다.

KⅡHOTEL은 내가 혼자 여행할 때 좋아하는 객실 형태인데 독립성이 보장되는 도미토리룸이랄까. 크게 오픈된 공간에 2층 침대가 여러개 있고 각각에 커튼이 달려 있는 식이다. 침대는 한 평이 좀 안될텐데 누워 있으면 아래가 뚫린 관의 형태이다. 딱 이만큼의 공간에서도 충분히 하루 동안의 피로를 풀 수 있다. 어째서인지 나는 방에서 혼자 자는 것은 괜찮아도 집에서 혼자 자는 건 싫은데 그래서 혼자 여행하게 되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권리를 추구함과 동시에 벽넘어로 아무도 없지 않다는 느낌을 받고자 이런 타입의 숙소를 선택하는 것이다. 아래는 숙소에서 준 웰컴카드다. 오리가미도 있었는데 잠깐 미소짓게 만드는 이런 세심한 배려가 참으로 좋다.



구마모토에서 별다른 관광을 하지는 않았다. 잠깐 숙소에서 몸을 녹이고 시내로 나갔으며 서점을 돌아다녔다. 첫날부터 짐이 무거워 질 것을 우려하여 책을 사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Animate라는 만화 및 애니 전문 서점에 들어가서 <너의 이름은> 1권을 샀을 뿐이다. 아직도 "覚えてない?" 하면 아직도 소오름이 돋는게 아 정말 혼모노 인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