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깊은 밤, 기린의 말

00. 시작하는 말과 계획


시작하는 말


여행을 다녀와서 이제는 남을 위한 글을 쓸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것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정보일 수도 여행을 결심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반대가 되어 결심을 접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읽는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이번 여행의 깨달음은 나에게도 실로 뜻밖의 것이었다.


여행중에 일기는 매일 썼지만 일기를 쓰면서도 한국에 돌아가면 블로그에 다시 옮겨 적어야 할지, 구지 찾아오는 사람 없는 블로그에 그런 수고스러운 일을 내가 왜 해야할지를 고민했던 건 첫째로 나 또한 다른 여러 블로그에서 도움을 받았기 때문인 것과 둘째로 닷짱 때문이다. 특히나 '혼자 하는 여행길'에 다른 이의 '혼자 했던 여행기'를 읽는 것은 내가 할 삽집이나 처할 곤란한 상황을 줄여준다는 이점이 있지만 이를 대놓고 강조하지는 않겠으며 다만 너도 혼자냐! 나도 혼자다! 를 외칠 수 있는 동병상련 격의 대단히 큰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때문으로 하자. 둘째 이유로 언급한 닷짱은 이번 여행에서의 핵심이 되는 인물로 야쿠시마 숙소 '후렌도(ふれんど)'에서 만났는데 여행기 후반부에 등장할 예정이다. 나는 야쿠시마에 또 오리라고 다짐했는데 아- 그때는 둘이면 좋겠다- 아무튼 그때에도 후렌도에 머물 것이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이심전심 고독을 함께 해준 해당 블로거의 <가고시마 혼자 여행> 맺음말에 '혼자만 기억하고도 만족할 정도로 강한 사람은 못 되니까' 라는 말을 이해하게 된 후에 블로그에 본 여행기를 쓰기로 마음 먹게 되었다.



계획


"여행을 가겠어!" 

라고 혼잣말 보단 강하게 그렇다고 가족들에게 통보는 아닌 말투로- 한낮의 일요일이었던 것 같다. 왜 가고시마고 왜 철도여행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명확한 이유를 찾아내고 싶은 것이 성격이고 또 하는 일인지라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그저 그 전 주 잘될 뻔한 썸(그렇고 그런 관계를 썸이라고 지칭함)이 빠그라졌는데 그 남자가 1월에 소진되는 휴가가 있어서 어디를 가야할지 모르겠다고 했을 때 내가 일본을 추천했던 것. 페이스북에서 꽤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전 직장 동료가 게시한 야쿠시마 사진을 봤던 것. 감독과의 대화를 포함해 <너의 이름을>을 일주일에 두 번이나 보고 그 감성에 절어 역시 애니메이션은 일본이지 했던 것. 운명과도 같이! 알라딘에서 <에키벤> 2~5권을 찾아낸 것. 그랬다.      


그리하여 1월 달력을 보면서 머리를 굴려보니 구정 전 '금, 월, 화, 수, 목,' 5일을 쓰고 귀국해서 3일을 쉴 수 있는 일정이 가능! 선 지름 후 품의지! 기세 좋게 결제했으나 날짜가 다가올 수록 행여나 프로젝트 일정이 변경되어 못가게 될까봐 걱정했던 것은 사실이다. 휴가를 그렇게 써도 되는가 싶겠지만 나는 일전에도 '금, 월, 화, 수, 목, 금, 월'을 내고 10박 11일을 다녀온 전적이 있다. 그러고보니 그때도 1월이었고 그때도 못가게 될까봐 노심초사 했으며 그때도 연말정산을 미리 처리하느라 여기저기 물었던 것 같다. 그나저나 연말정산은 할 때마다 모르겠다. 


일단 가고시마 인아웃으로 항공권을 결제하고 나니 7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생각했다. 약 한 달 전에는 지금과 같은 자세로 지금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오호라- 어떻게 다녀볼까'를 생각했는데 벌써 후기를 쓰고 있다니 착실하게 가는 것은 시간 뿐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여행 일정의 큰 그림은 심플하게 그렸는데 첫 3일간은 JR남큐슈 패스를 이용하여 열차를 히치하이킹 하듯 실컷 타기, 이후 3일간은 야쿠시마 그리고 마지막 하루는 가고시마 시내로 계획했다.


+ <에키벤>


하야세 준 작화로 만화 <에키벤>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기생 및 촉수물을 좋아하는 한편 다니구치 지로 같은 고전 만화의 정석류도 좋아하는데 나에겐 만화계의 나쓰메 소세키 즈음 되는 분이다. 실제로 다니구치 지로 작화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을 근간으로 삼은 만화 <도련님의 시대>가 있다. 어쨌든 <에키벤>을 보면 일본인의 철도 사랑에 놀라고 철도 사랑에서 비롯된 건지 도시락 사랑에서 비롯된 건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창작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에 두번 놀라게 된다. 심지어 나까지 철도 매력에 빠져 요새는 건담 모형에서 철도 모형으로 옮겨갈까 망설이고 있다. 


이야기가 자꾸 샛길로 빠지지만 '에키벤'이란 기차역이나 차내에서 판매하는 도시락으로 역을 의미하는 '에키'와 도시락의 '벤토'를 합친 말이다. 일본에는 각 철도역마다 해당 지역의 특산물로 에키벤을 만들고 매해 콘테스트도 개최하는 등 2500종이 넘는다고 한다. <에키벤> 1권은 큐슈를 다루고 있으며 나는 이 책을 중심으로 여행 루트를 짰다.


1일 : 가고시마 ▶ 구마모토

2일 : 구마모토 ▶ 요시마츠 ▶ 하야토 ▶ 미야자키 ▶ 노베오카 ▷ 다카치호    

3일 : 다카치호 ▷ 노베오카 ▶ 미야자키 ▶ 가고시마추오  


※ ▶는 JR남큐슈 레일패스로 이동한 구간이며 ▷는 버스로 이동한 구간이다. 만화책에서는 노베오카와 다카치호를 열차로 이동하나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현재 해당 구간은 패쇄되어 토롯코 열차도 노베오카 은어초밥 에키벤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