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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기린의 말

02. 둘째날


까마귀


구마모토역에서 본격열차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커피 한잔의 여유를 갖고자 숙소를 조금 일찍 나섰다. 다음날 일정이 있으면 잠을 제대로 못자는 탓에 6시 반 즈음에 나왔는데 어제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KⅡHOTEL이 위치한, 중심가라고 표현했던, 그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종로 같은 곳으로 전날의 취객을 거리에 다 게워낸 모습이었다. 24시간 영업하는 곳에는 아침을 해결하는 사람과 (전날의 술자리를) 아침까지 해결하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고 아직 술이 덜 깬 듯한 사내는 쿠마몬 형상의 조명을 노려보기도 했다. 청소차가 거두어가지 않은 쓰레기가 한 구석에 쌓여있었는데 까마귀 대여섯 마리가 쓰레기 봉지를 쪼아대고 있었다. 히이익- 까마귀다- 까마귀! 컸다! 조금 무서웠다. 




Sanfrancisco Best 


구마모토에 도착한 날보다는 날씨가 좋아서 아침햇살 아래 동네를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다. 일본 영화에서 보던 풍경으로 강둑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자동차가 아니면 자전거를 탔고 그 때문에 거리에는 걸어가는 사람이 없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더군다나 한짐 짊어지고 걸어가는 나같은 사람은 더더욱.


구마모토 아침 길거리


구마모토역에는 그 흔한 스타벅스 하나 없었으나 당을 보충할 수 있어 보이는 카페가 하나 있었다. Sanfransisco Best. 하필 왜 샌프란시스코인거냐 싶지만 상관없다. 모카를 한잔 시키고 독고다이席, 그러니까 창가를 마주보고 앉는 자리에 앉았다. 역시나 친철하게도 자리에 가져다 주었는데 커다란 머그잔에 초코스틱이 얹어져 있었다. 모카에 초코스틱이라니 신의 한 수다! 머그잔을 쥐고 의자와 내 몸이 하나가 되리라는 듯이 자세를 취했으나 누가봐도 그건 널부러진 것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을 가장 사랑한다. (널부러진 순간 말고) 타지에서의 모닝커피 때문에 여행한다고 해도 좋다. 덧붙여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평일 오전 일 것, 사람은 적당히 많을 것, 커피는 달 것. 그렇게 사람들이 아침을 시작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시작이 매우 좋은 아침이었다.

구마모토 아침 시작



ISABURO / HAYATO NO KAZE

드디어 이사부로 열차에 탑승! 오늘 예정한 '이사부로'나 '하야토노 카제' 열차는 D&S 타입의 열차로 Design&Story Train의 줄임말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관광열차인 셈이다. 어제 가고시마추오에서 구마모토를 신칸센으로 한 시간만에 온 것을 히사츠선을 통해 네 시간 동안 가는 것이다. 히사츠선은 1909년에 개통한 루트로 당시에는 가고시마 본선이었다고 한다. 이사부로 열차는 진한 붉은색으로 3량으로 운행하고 있었는데 내가 탄 칸에는 혼자 여행하시는 할머니와 역시 혼자 여행하는 여성 승객이 한 명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있었다. (미리 말하지만 이후에도 그렇고그런 만남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은 계속된다) 열차가 출발하고 창밖을 바라보는 할머니를 보면서 문득 저렇게 늙고 싶다, 나이듦이 부끄럽지 않은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필름 카메라에는 그 모습을 담았으니 빨리 현상해 보고 싶다.   
관광열차 답게 풍경을 잘 볼 수 있도록 창가를 디자인 한 부분과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도 이동에 무리가 없도록 손잡이를 디자인 요소로 활용한 부분, 심지어 햇빛은 적절히 막아주되 시야를 완전 차단하지 않는 차양막까지 인상적이었다. 나는 히토요시 에키벤과 카레이가와 에키벤을 예약하거나 열차 스탬프를 찍어달라는 둥 약 네 시간 가량 열차 승무원을 적잖이 귀찮게 했었는데 내가 내리는 역을 기억했다가 찾아와서 잘가라고 인사도 해주었다. 

히사츠선 명관


철광아저씨와 열차 승무원


히사츠선에는 스위치백과 루프선을 경험할 수 있는 오코바역이 있는데 오코바역에 정차하자 누가봐도 철도광이다! 싶은 할아버지가 후다닥 뛰어나가 여기저기 사진을 찍었다. 이후에도 열차가 정차하는 역마다 이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여기저기를 뛰어다니시는데 필름을 현상하고 나면 이 분도 확인할 수 있다. 열차 내에는 히사츠선 상의 관광 스팟을 설명해주는 인쇄물이 비치되어 있으며 열차 승무원은 해당 장소에서 방송을 해준다. 나는 <에키벤>을 보면서 음 대충 이 멘트는 이런 말이겠구나 하면서 들었다.  


카레이가와 역


사요나라 이사부로


하야토노 카제


열차 미스터리를 연상케 하는 객실




미나미 미야자키에서의 귀여운 연속 컷


연속되는 귀여운 쌍


딱 이만큼의 색감으로 기억하는 미나미 미야자키



다카치호 요가쿠라

노베오카 버스센터에서 다카치호 버스센터까지 1시간 20분 가량이 걸린다. 노베오카 버스센터에서 다카치호행 버스티켓을 구매하려고 했더니 미야자키 1일 버스패스가 다카치호행 편도 요금보다 저렴하다고 알려주어 이를 샀다. 돌아올 때도 필요하지 않냐고 물어봐주어 두 장 샀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이 언니로부터 다카치호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는데 이런 친철에 익숙해져 버리는건 아닐까 하는 쓸떼없는 걱정도 했다. 

노베오카 버스센터 출발


다카치호는 일본 건국신화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나는 신화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이 곳에서 밤을 새워 행한다는 가쿠라(제사)를 보고자 했다.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것에 로망을 느꼈는지 모르는데 온다 리쿠가 <밤의 피크닉>란 주제로 책을 냈을 때 나는 이 작가는 무조건 좋아하기로 했다. 대학생 때는 여의도에 심야 벚꽃구경을 가자고 했다가 심야의 벚꽃은 낮의 그것과 몹시 다르며 봄에도 새벽은 춥다는 것을 깨달았고 언젠가 친구와 양평까지 야간보행 여행을 계획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기억에 없다. 
결과적으로는 다카치호 신사에서 8시부터 한 시간 가량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가쿠라만 보았는데 <일본신화의 고장 다카치호의 요가구라>(저자 박원모) 를 참고하면 내가 보고자 한 가쿠라에 대해 더 많은 내용을 알 수 있다. 

매년 벼 베기가 끝난 11월 말에서 이듬해 2월초에 걸쳐서 다카치호의 각 마을에서는 가구라가 행해진다. 일반 민가를 택하여 가구라를 연행하는 가구라야도(神樂宿)로 삼고서 밤을 새워 33번의 가구라가 봉납된다. 다카치호의 가구라는 주로 철야로 행해진다고 하여 요가구라(夜神樂)라고도 한다. 가무를 담당하고 있는 호샤동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마을 사람들로 이들에 의해 다카치호 가구라는 전승되고 있다. 다카치호 가구라는 현재 20여개 마을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국가지정 중요무형민속문화재로도 지정되어 있다.  


홈페이지에서 날짜도 알아보고 갔으나 10km, 14km의 길을 밤새워가며 이동한다고 했고  

혹시나 길에서 마주친다고 해도 그건 엄청난 우연일테니 본다면 로또! 라는 생각이었다. 숙소 매니저에게 물어도 잘 모르는 것을 보니 관광객 중에는 요가구카를 묻는 이가 많이 없는 것이 분명하고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전승된다고 하니 숙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관심 밖의 일인 것 같다. 다카치호 신사의 가쿠라도 전승한다는 그 의미는 동일할 것으로 공연을 보고 느낀 바는 적지 않았다.  



공연 시작전에 대표 영감님이 가쿠라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당연히 일본어이기 때문에 입구에서 언어별로 나눠주는 인쇄물에 의존하여 배경지식을 쌓으면 된다. 하지만 공연중에는 배우들에게 대사가 없으므로 몸짓이나 행위에 대해서는 각자 느끼고 생각할 일이다. 여기서 또 한번 혼모노 인증을 하게 되지만 '이것도 무스비' 라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는 가쿠라나 저 영감님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가쿠라는 과연 어떤 가치관이나 신념? 집녑? 의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나에게는 그렇게 지켜내 갈 수 있는게 무엇이 있을까. 언젠가는 이 질문에 대한 해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 날은 혹시나 숙소 앞을 지날지도 모르는 가쿠라 행렬에 귀를 열고 잤다.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어디선가 신념을 다하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