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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기린의 말

코코코엔


요샌 무턱대고 귀여운 영화보단 그에 모순되는 형용사 하나가 더 붙은, 예를 들면 망측하게 귀엽다던가 하는 것들이 좋다. 우리도 그러잖나. 여자 얘한테 단지 '귀엽다'고만 하는 건 칭찬이 아니라고, 매력 없는 소녀들에게나 붙이는 나약한 형용사다. 어쨌든 코엔 형제는 그 고유명사만으로도 어떤 트렌디함을 보이는 표현법이 되었으니, 귀여운 코엔 형제라는 것도 충분히 모순된 형용사쯤 되지 않을까.

세상이란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전제 차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므로, 혼자 사는 세상이란 건 성립될 수 없는 표현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방법은 관계성을 터득하는 것이렷다. 눈치만으로도 단 수를 세는 세상에 그것은 살아가는데 하나의 능력임이 분명하다. 여기 영화에 유독 사람들과 사는 방법이 다른 1人이 있다. 인체 내에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메인보드란 게 있다면 래리 것만 거꾸로 끼워져 있을 거다. 그러니까 그 컴에선 아예 작동이 안될 수밖에. 보기에 정상인 건 래리 뿐인데, 정신 나간 사람들 사이에 래리를 꿔다 놓은 건 코엔 형제가 2009년에 한 못된 짓 중의 하나다. 분명 우리를 놀려 먹으려는 의도임을 알겠다. 그래도 말없이 방귀 뀌는 것보다 덜 괘씸하니, 영화 시작에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Receive with simplicity everything that happens to you.

코엔씨들의 이전 영화에서도 그리고 여기서도 보이는 특징은 삶의 모든 불운이란 요소들을, 31가지 맛이 있는 아이스크림가게에서 파인트를 시키듯, 그 맛과 담는 순서의 결정이 저녁 시간 가족의 디저트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관객들은 그 끝을 어디로 치달을 지 가슴 졸이고 궁금해하다가, 마침내 멈춰 선 지점에선 다 먹어버린 팝콘과 얼음만 남은 콜라 컵 따위를 쓰레기통에 휙 던지는 감동만 남듯, 파앗-번쩍-짜릿-하다.

그들의 영화를 블랙코미디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아는 것에 종속시켜 버림으로써 안다고 믿어버리고자 하는, 펜마다 이름을 써 붙이는 얘들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내 수첩에 담아두고 읽어 보는 소세키의 많은 문장 중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학생을 훌륭한 독자로 이끌어주었던 자신의 고교 선생을 자기가 아는 것 이상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늘 (지식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공부를 제외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그 이상으로 얻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잘 보는 방법이라는 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하여 내가 블랙은 느끼지 못했더라도 코미디는 느꼈는데 영화에서 코미디의 원인은 문화 간의 충돌이다. 나는 미국인도 아니고 유태인도 아니라 그 코드를 잡기가 쉽지 않았는데 미국인 이웃이 코믹스러워야 하는 캐릭터임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음에도 웃긴 거다! 라고 느끼게 된 건 영화 후반부에서다. 어쨌든 포스터에서 볼 수 있듯이 삶을 단순하게 살라고! 외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래리가 단순할 수 없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미국 사는 유태인이고 한국학생을 가르치기도 하는 등의 우연적인 요소들이 정신없이 혼합되어 있다. 그래도 우리는 억지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렇게 복잡한 삶의 전제가 그를 쉽사리 단순하게 만들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단순할 때는 오직 꿈에서만이다. 꿈에서는 아무런 제약도 없다. 이웃집 여자와 내통하기도 하고 뇌물을 받기도 하고 동생을 떠나보내기도 한다.그래서 그는 꿈을 자주 꾼다. 억압된 욕망이 실현되는 아주 심플한 꿈만 같은 곳이다.
함정이란 함정은 다 만들어 놓고 톰을 기다리는 제리가 코엔이라면 흠씬 두들겨 맞은 톰을, 래리를 보며 배를 쥐어가며 웃기에는 안쓰럽지만 영화라는 필터를 거쳐 과장됐던 삶을 여기로 가져와 보자. 시종일관 현명한 랍비를 찾아가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저 유태인이 한국인이라면 청담 보살을 찾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도 있겠다. 부인의 간음은 사랑과 전쟁의 단골주제이니 이혼 의식을 요구하는 '뻔뻔한 아내' 편으로 하나 찍어도 좋겠다. 래리의 가족들은 래리의 상식으로는 통하지 않는 삶을 산다. 아들은 마약을 하고 동생은 게이 매춘에 아내는 간음 했다. 래리는 위상학적으로 중심에 있음에도 삶의 기반 자체는 서로 다른 판에 속해 있다. 우리는 이런 극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나와 전혀 판이 다른 사람을 우리는 하루에도 몇 명이고 마주할 수 있다. 그때마다 랍비를 찾아갈 수는 없는 거다. 그럴 때마다 저기 저 주차장을 한번 내려다보라는 랍비도 있는 걸.

아까 도서관 올라가는 길에 지나가던 친구가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냐고 물었던 것이 생각났다. 단지 휴강인 줄 알았던 설계수업이 정상으로 진행될 거라는 문자를 받은 후였는데 그치만 으아, 난 정말 심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