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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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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철_그 남자의 가방


카모메 식당을 보면서 핀란드를 가고 싶다고 생각한 것처럼, 마르케스의 책을 읽으면 카리브해에 가보고 싶단 생각을 한다. 이처럼 우리가 영화나 책에서 얻은 인상은 어떠한 계기를 만들어 그곳에 가고 싶게 만든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환상과 상상을 적절히 꺼내어 보여준다. 그런데 보는 영화야 그렇다 쳐도, 읽는 것만으로 마음속에 그려진 인상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몇 달 전에 소세키의 '나의 개인주의 外'를 보면서 위대한 작가란 무릇 자신의 삶과 소설이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로구나 했는데, 오늘 마르케스의 산문집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소세키와 마르케스는 자신의 소설이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선 다른 지점을 보여주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이 '이야기'하는 이유는 같다. 현실은 누구보다 완벽한 작가이기 때문에 소설이야 말로 겸손하게 그런 현실을 모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세키의 젊은 날은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그리고 꽤나 치밀한 고민의 시간으로 꽉꽉 차있었다. 그의 무던한 문체들을 보면서 나는 꽤 소세키에 무한한 동경과 동시에 거리감 또한 가지고 있었다. 오직 성숙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분위기는 어느 날이든 갑자기 그의 책이 읽고 싶어지게 한다. 나에게도 이런 바다 같은 남자가 필요하다 생각할 때가 있듯이 나는 소세키의 책을 찾는다. 하지만 그가 서슴없이 보여준 구멍 많은 그의 젊은 날을 보면서 인간이란 완벽하게 태어나지 않는다는 점에 다시 한번 안도했고, 나는 왜 이리도 이루지 못한 것이 많음에 실망하였던가를 떠올렸다.

마르케스의 소설은 짧은 단문들이 반복되면서 리듬을 형성한다. 그의 단편 소설은 마치 시처럼 리듬감을 만들어 열댓 장이 채 안되는 글은 한편의 음악을 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를 표현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모순된 표현은 어쩌면, 사실을 말함에 있어 약간의 거짓이나 과장이 있더라도 독자들이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그의 마술사적 기질, 그것이리라. 그의 산문집을 보면 그는 순수한 사람이고 모든 좋은 작가란 순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집착하는 작가들은 없다. 인위적인 고안이 아닌 현실을 믿게끔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그가 하는 작업이며 우리 또한 순진하게도 그런 그의 작업에 홀딱 걸려든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훌륭한 독자임이 틀림없다.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 몇몇 연설문을 묶어 놓은 책이 있다. '아버지의 여행가방'이란 제목의 책은 그중에서도 오르한 파묵의 연설문 제목을 따서 올렸다. 여기에도 마르케스의 연설문은 있지만 오르한 파묵의 연설은 그보다 훨씬 가슴에 오래 남았다. 그만큼 위대한 작가가 되지 않았던 아버지는 자신의 원고를 그 여행가방에 모아 놓았고 그에게 언제든 읽어보라 말한 꺼림칙한 가방이었단다. 그 가방을 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만큼 위대한 글을 쓰지 못했을 경우 예기되는 실망감 혹은 정반대로 훨씬 위대한 글을 썼음에도 소박한 삶을 선택해버린 것에 비롯되는 실망감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왜 이토록 그 여행가방이 자꾸 생각나는 것일까.

나의 아버지의 꿈은 선생님이었다가 철도원이었다고 했다. 선생님 중에서도 문학선생님이었고 그 후에 철도원은 여행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빠는 서울에서 거제도로 배를 만들기 위해 먼 곳에 와 엄마를 만났다. 예전에 아빠와 올라간 일요산행에서 짧게 엄마 이전의 이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계기는 한창 글쓰기에 비범한 재주가 있었던 아빠는 라디오에 사연을 곧잘 보냈는데, 그때는 사연이 그저 읽히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연을 보낸 이에게 팬레터를 보내는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단다. 거기에 또 답장을 보내고 계속 되는 서신교환만으로 그 여자의 부모님까지 뵐 뻔한 '위험한' 경험 이후엔 편지 쓰기를 그친 것 같다. 그때 그 많은 편지는 다 어디로 간 걸까. 아빠의 옛날 사진을 보면 커다란 은색 앰프 옆에 큰 헤드폰을 쓴 장발의 남자가 있다.

나 또한 언젠가 말한 적이 있듯이 이야기는 나의 본능이다. 섣불리 단언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모두의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오르한 파묵은 잊히는 것이 두려워 책을 쓰고,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왜 그토록 화가 많이 나 있는지를 어쩌면 이해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쓴다고 했다. 난 예전엔 밤을 새워 라디오를 듣기도 했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 혹은 저 멀리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볼륨을 낮춘 음성을 잠들 때까지 찾아 헤매곤 했다. 사진 속 그 장발의 남자도 나와 같은 것을 찾았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