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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기린의 말

새해

졸업논문을 내고 꼬박 한 달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기로 했다. 내 스스로가 그렇게 다짐했다. 외출을 최대한 삼가하고 책도 읽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았다. 남자친구를 제외하곤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 시간은 아주 느리게도 빠르게도 갔으며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느끼곤 했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내가 했던 것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운명론자다. '운명론자'라는 단어에 정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운명이란 걸 믿는다는 식이. 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는 마땅히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백수 라이프를 당당히 즐기기로 했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 또한 이유가 나타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쯤되면 당당함이 도를 넘어 뻔뻔하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이를 이해해주시는 부모님이 감사해 그분들의 식사를 챙겨드리는 일만은 철저히 했다.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는 이유라는 것들은 때때로 정말.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고 나는 현명해야 했다. 나의 마음을 뺏고 눈을 멀게하는 유혹에 수백번 흔들려 이를 견디는 것 또한 마땅히 견디어야 할 나의 운명이었다. 그리고 운명이란 건 영화에서처럼 '어느날 불쑥' 찾아와 빠져들게 하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는 것 같다고도. 


구정을 지내야 진짜 새로운 해를 맞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운명과도 같은 이유라는 것이 새해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올해의 잇 플레이스, 알라딘 중고서점. 헌책방은 곰팡이 냄새가 나는데 중고서점은 치과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