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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기린의 말

빠빠라기

한 권의 짧은 책을 읽는 동안에 이것이 시모아 섬의 이투아비 추장이 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바라본 세상을 올 곧이 나의 눈으로 읽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빠빠라기가 흔히 우리가 부르는 백인이라고 읽히지 않고 단어가 풍기는 그 낯선 만큼 나에게 자꾸 ‘원주민’을 상기시켰다. 이런 실수를 범하는 것 자체가 내가 가지고 있는 자 문화중심의 사고방식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또 한편으로 이 책은, 19세기 아메리카 원주민이 땅을 정부에 팔라는 요청에 대한 답신에서 볼 수 있는 자연적인 교훈을 주지 않는다. 저자 또한 자신을 형성하는 문화가 체화된 공격적이고도 방어적인 시선으로 유럽문화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 또한 다분히 자 문화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투아비 추장 또한 결코 성인군자도 아니며 옷을 다르게 입고 다른 음식을 먹어도 우리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임을 드러내는 것이 이 책이 유쾌한 이유이다. 우리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이상한 것이라고 큰소리치고 있는 것이 참으로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콜라병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기 위해 떠났던 조롱당하는 아둔한 부시맨은 여기엔 없다.

나란 존재를 이 책을 읽고 원주민과 유럽문화 중 어느 부류에 놓아야 할까 생각하다가 결국 그 중간에 놓기로 했다. 나는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 살고 있으나 시모아 섬의 사람들보다는 옷을 많이 갖춰 입고 있다. 어느 시점에선 서구화된 동양이라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서구와 같은 문화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나는 ‘만들어진’ 동양의 판타지문화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문화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서구에서 온 것이며, 나는 결코 온전한 made in Korea의 시각을 가져 본 적이 없음을 고백한다. 나는 동양에 사는 서양인인 척하는 한국 사람이다. 이러한 중간 영역은 시민의 정치적 성향 중 ‘중도’를 표현하던 것만큼이나 애매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나는 나의 문화를 평가하는 것이 (하물며 남의 문화를 평가하는 것 또한!) 쉽게 무어라 규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끔은 혹은 자주 종종 절대적이란 것은 있을 수 없어, 스스로를 객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진다. 불행히도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도 우리가 마주치기도 이전의 권위 있는 사람들이 신중하게 기록하고 새겨 넣은 사건이며 감각적이고 체화된 사건이기도 하다. 수잔 스튜어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감각적 수단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한다. 하지만 감각 자체를 결정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경험이다. 몸에는 그 바깥 대상과의 조우로 만들어진 신체적 기억이 담겨 있다.”

우리의 신체적 기억을 더듬어 보자. 언제나 파란 눈에 금발이 가득한 서양은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어렸을 적부터 영어를 잘해야 한다고 배워왔다. 나는 그나마 중학교에 들어서야 알파벳을 배웠다지만 요새는 초등학생부터 영어를 배운다. 국어를 잘하는 것보다 영어를 잘하는 것이 어른이 되어서 연봉 앞 자릿수를 결정하는 것임을 깨달아간다. 서양의 문화가 동양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다 못해 비굴한 자세로 떠받들어 온 나의 억압된 콤플렉스는 저자의 공격을 받으며 잔뜩 움츠러들었다가 읽어가는 페이지가 늘어날수록 어느 정도 해소된다

이 책은 마치 조선시대 청나라에 보내졌던 사신이 보고 들은 것을 임금 앞에서 고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전혀 다른 문화에 부딪혔을 때 우리가 보이는 반응은 유일하게 두 가지로 나뉜다. 좋거나 나쁘거나.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저자는 청나라에게 문호를 개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신과 같이 타문화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완전히 나의 삶을 이루고 있다고 믿어왔던 하나의 긴 신념의 끈을 싹둑 잘라내 버린다.

그렇다면 저자가 극도로 기피하는 유럽사회를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았는지 살펴보자. 하지만 그 전에 언어에 대해 염두에 둘 것은 우리는 가져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달리, 능히 설명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유럽인의 의복 생활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딱딱한 껍데기’나 ‘윗껍질, 아랫껍질’ 등과 같이 그들의 단어를 써 가며 설명하며 우리는 이것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또한 에스키모에게는 무지개를 의미하는 단어가 무려 백 개가 넘듯이 그들에겐 ‘내 것’ 혹은 ‘네 것’이라는 개념이 없어 소유물은 모두 ‘라우’라고 말한다. 이로서 사모아 원주민들이 완전한 공유재산제라는 점을 언어에서 알 수 있는데 이것들이 언어와 같이 그들 삶의 바탕을 이루는 것들이다.

여기 우리의 삶은, 그러니까 시모아 섬의 원주민들과 다른 우리의 삶은 욕망으로부터 출발한다. 많은 물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가난하기 때문이며 위대한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몇 일전 입적하신 법정 스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스님이 말하는 무소유란 단순히 아무것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는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 현대인의 불행은 모자람에서가 아니라, 넘침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설파한 스님의 생각은 저자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저자는 대접을 했다고 해서 뭔가를 요구하거나 뭔가 해주었다고 해서 선물을 탐내는 것을 경멸에 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네 것과 내 것을 나누고 비교하고 더 욕망하는 것은 공포심 때문인데, 남들이 더 가진 만큼 내가 더 불행해짐은 이러한 공포의 원인이며 끊임없이 우리가 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가 생기면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을 만들려면 일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책을 이어나간다. 여기서 일이란 곧 돈을 만드는 노동이며, 직업일진데 저자에 따르면 모든 ‘직업’은 그것만으로는 불완전한 것이다. 모든 것이 함께 어울려 움직이는 것이 인간인데 우리 시대의 철저한 분업화는 몸의 전부가, 마음의 전부가 함께 움직일 수 없게 한다.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내가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가치들을 송두리째 흔들며 모든 걸 반박한다. 결국엔 생각하는 것까지 이러한 정신은 곧 사상이고 자랑이요 앞세우고자 하는 욕망을 나타낸다고 여긴다.

매체에 대해 저자가 보인 뛰어난 통찰력은 재치 있기까지 하다. 영화관은 이것이 ‘바로 내 모습’이라고 믿어 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어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곳이다. 진짜 생명을 지니지 않은 속임수의 그림을 자기 마음으로 끌어당기는 일이 우리에게 커다란 즐거움임을 간파했던 것이다. 또한 신문에 대해서는 커다란 지혜라는 애칭을 붙여주며 무슨 일이든지 게걸스럽게 쓸어 모아 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모든 사람의 머리를 하나로 통일하고 남의 머리, 남의 생각을 정복하려고 하는 오늘날의 매체가 휘두르는 부당한 권력을 경고했다. 보이는 글자가 박혀 있는 거적을 인생 그 자체라고 생각해 버리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근대의 매트릭스다. 근대의 빅 브라더다.

서로 다른 문화는 혹은 그 다름에서 오는 차이는 지정학상 이유나 피부색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지리적으로 어디에 있던 모두 사회적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상대적’이란 개념이 생겨났고 모든 차이는 상대성에서 오기 때문이다. 원주민과 유럽인들과의 관계, 어른과 아이의 관계 그리고 남성과 여성도 사회적 관계에 있다. 인간의 욕구 중에서 명명[命名]하고자 하는 욕구는 수많은 현상에 이름을 붙이는데 (파시즘이나 페미니즘과 같이) 강자와 약자의 관계가 곧 사회적 관계이고 현상이다.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쪽은 현상이고 절대 소수의 지지를 받는 쪽은 이면이다. 현실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선 이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음을 늘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 이쪽에 있으면서 저쪽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간혹 이러한 출판을 통해 절대 소수의 목소리가 수면화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처럼 귀 기울이게 되기까지 한 세기가 거의 지나서야 가능해졌다.

나는 추장의 연설은 재미있다고 여기지만 결코 나의 삶을 지탱하는 가치들이 그의 표현을 빌려 ‘악마’적인 것이 깃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그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는 부분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다 쓰지 못할 만큼 많은 시간이 있다는’ 페이지뿐이었을 정도로 많은 부분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코 나의 문화가 옳지만도 그의 생각이 틀리다 고만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이곳에. 여기에 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