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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기린의 말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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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우유를 버린 건 5학년 때부터이다. 그전에도 우유를 버렸었는지 혹은 그전에는 우유 급식을 안 했었는지 모르겠으나 정확한 기억은 5학년 때 부터란거다.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우유를 버린 곳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곳은 내가 5학년 때 이사 온 아파트였다. 물론 매일같이 우유를 버린 건 아니다. 다만 매일 우유를 먹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난 그 초록색 박스에 다 먹고 몇 방울씩 남았을 빈 우유 상자들이 모여서 풍기는 냄새가 지독히도 싫었다. 뜯어버린 우유란 그런 것이었다. 게다가 냉장고에서 갓 나온 차가운 우유도 아니었다. 또 다 같이 한 교실에서 한꺼번에 우유를 마시고 모두의 입안에, 혓바닥에 흰 자국들이 남은 모습을 보는 것도 그 입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난 되도록이면 우유를 같이 먹지 않았다. 나 또한 그러하리란 것에 견딜 수 없었던 거다. 그래서 우유를 집에 가져오기 시작했는데 또 왠지 미지근한 우유를 다시 차갑게 만든다 해도 내 머릿속에 저건 미지근한 우유였기 때문에 차가워 진다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집에 가져와도 별수가 없었고 엄마한테 혼나기도 했기 때문에 간혹 계단실과 대문 사이의 철제문 뒤에 버리곤 했다. 철제문은 언제나 열려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확인해서 보지 않는 이상 일렬로 나란히 있는 우유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한날 싹 치우시곤 했을거다. 하지만 그런 상태로 오랜동안 있으면 그것도 여름에 부풀대로 부푼 뚱뚱한 우유각은 어쩐지 나를 더 불쾌하게 하기도 했다. 늘 우리집 계단에 버린건 아니다. 어떤 날은 다른 통로에 가서 가지런히 놓고 오기도 했다. 왜 따서 싱크대나 변기에 버리지 않았나 모르겠는데, 절대 따서 버리지 않았다. 온전한 상태 그대로 버렸다. 내두고 왔다는 표현이 더 맞을거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쯤은 내방 창문으로 냅다 던져버리기도 했다. 5층에 살았는데 창문을 열고 우유를 던지고 바로 문을 닫는다. 그러면 둔 탁한 소리가 퍽- 하고 난다. 우유가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문을 닫는 것이 나름의 법칙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내가 던진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튼 그 던짐은 밤에만 했는데 나는 떨어지는 우유를 지켜보지 않았음으로 창문을 닫고 그 모습을 상상해야만 했다. 까만 밤에 하얀 우유가 퍽 하고 터지는 모습을. 그 다음 날 아침에 내려다보면 역시나 까만 아스팔트 바닥에 허연 페인트로 그림을 그린 것 같이 기분이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몸집에서 그런 폭력성이 나왔다니 이상할 법도 한데 나는 그런 식으로 그 냄새를 싫어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