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언어

[re]say 1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Ramlog 2015. 9. 29. 00:35

 

유난히 오고가는 연락이 많은 한 주였다. 금요일 오후에는 대학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월요일이었나 갑작기 연락해서 어디서 볼지를 정하진 않고 어디'에'서 볼지를 먼저 정했다. 공차에서 보자고 했다. 공차를 좋아하진 않지만 왠지 친구는 여자들은 으레 공차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동안 서로에게 일어났던 일과 지금 살아내고 있는 일 등을 두서없이 이야기했다. 가장 핫하게 나눈 이야기는 물론 Y에 관한 이야기였다. 친구는 "아직까진 결혼을 잘 한 것 같아"라고 말하면서 본인의 지난 연애들을 뒤돌아봤고 그런 경험들은 명백하게 실패한 연애였다고 말했다. 덧붙여 나에게 이번 실패한 연애에서 잘못한 점을 깨닫고 다음번엔 잘 해내길 바란다고 했다. 연애의 성공은 곧 결혼이라는 수식을 첫여자친구를 사귀기도 전에 정립한 친구였다.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실패한 연애, 아니, 경험에서의 실패라는 단어가 과연 적절한가를 생각했다. 그때 Y와의 만남은 실패한걸까. 지금 Y와의 이별은 성공한걸까.

지금 계속 만나고 있다면 그때를 실패라고 말할 수 있는걸까.   

 

 

연휴라 그런지 토요일 서울 시내는 한산했다. 걷고 싶은 만큼 걷고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가 씨네큐브에서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보았다. 남자라는 대명사의 지지리 궁상을 큰 화면으로 보고 있자니 性이 다름에도 種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을 나누고 나니 극장안의 사람들과 모두 친해진 느낌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그날 친구와의 대화를 생각했고 실패 혹은 성공한 연애에 대해 생각했고 또 영화에 대해 생각했다. 왜 사람들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 익숙할까. 과거를 부정하고 현재가 옳다고 믿어버리는 자기 암시가 선택하지 못한 삶에 대한 위로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은맞고...>의 희정을 생각했다.

영화의 이야기는 춘수를 따라가지만 방향은 희정을 따라간다. 서로 다르길 기대하는 두 가지의 이야기를 놓고 춘수는 동일한 태도를 유지하지만 희정이 "감독님은 말을 너무 막 하시네요"를 못마땅함과 함께 내비침으로써 비로소 다른 이야기의 방향이 생겨난다. 만약 두 번째 이야기에 희정이 아닌 다른 여배우가 출연했다면 그것은 (물런 홍상수의 영화도 아니겠지만) 세상 모든 여자가 내 것일 수 없을까 하는 망상남의 미연시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것 정말 끔찍하다. 

또한 희정은 영화의 제목과도 같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반대로 두 이야기에서 동일한 태도를 유지하는 춘수는 지금도 맞고 그때도 맞는 세계에 사는 인물인 셈이고. 카페에서 희정은 자신이 이전에 하던 일을 그만두었음을 고백하며 모든 일이 허무하게 느껴졌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희정에게 그때는 틀린 것이며 지금은 맞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지금이 '맞다'고 할 수 있는 근거를 관객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암시에 걸린 희정이 하는 말로 추측할 뿐이다.

 

관객이 다 나가도 끝나지 않는 다른 영화들의 크레딧에 비해 <지금은맞고...>는 실로 단촐한 크레딧이었다. 제목의 미스터리를 아직 풀지 못했는데 앞서 이동하던 여자가 일행에게 말했다. "야 뭐, 지금도 틀리고 그때도 틀리고네." 

맞고 틀림과 지금과 그때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고 구분하냐에 따라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가지 외전으로 플레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맞고 그때도 맞는'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고 비참한 엔딩이었을지언정 결코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지금은 언젠가의 그때가 될 것이고 지금 믿었던 맞음은 그때가 되어 얼마든지 나를 배신할 수 있다. 그러니 나의 자기 암시는 나에게 실패는 없었음을, 모든 경험이 다 가치가 있었음을 믿고 계속되는 뻘짓을 위로 하는 방법 뿐이다.